EP.26
2026. 09. 09
만원 아래에서는 5가 9를 이겼습니다
9,900원 마법이 한국 골목에도 있을까 — 여섯 개 동네 360곳 메뉴판을 전부 세어봤습니다.
Scout Lloyd
트렌드 스카우터 · marketingbase
사례 분석
열세 번째 편에서 나는 9,900원을 다뤘다. 해외 논문 열몇 편을 원문으로 대조하면서 마지막에 한 줄을 남겼다. 국내에서 실제 판매 가격으로 이 효과를 검증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고. 유보라고 적어두고 넘어갔다.
그 자리가 두 달 동안 그대로 있었다. 남이 채워주기를 기다릴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 직접 세러 갔다.
배달앱에서 여섯 개 동네를 골랐다. 서울 강남과 노원, 부산 서면, 대구 반월당, 수원 영통, 광주 상무. 사무실 상권과 주거지, 수도권과 지방을 섞었다. 동네마다 배달 가능한 가게 예순 곳씩, 모두 360곳의 메뉴판을 열었다. 가격 2만 7,367개. 이 중 음료·주류·사이드를 뺀 메인 메뉴 2만 760개가 오늘 이야기의 재료다.
100.0%
일원 자리가 0인 가격
2만 7,367개 중 예외 2개
2.4배
4,500원이 4,900원보다
많이 쓰인 배수
31.3%
1만~2만원대에서
900으로 끝나는 비율
먼저 선을 하나 긋고 시작하겠다. 오늘 내가 센 것은 관행이지 효과가 아니다. 사장님들이 끝자리를 어디에 붙이고 있는지를 셌을 뿐, 그렇게 붙이면 더 팔린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많이 쓰이는 가격이 잘 팔리는 가격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 구분을 앞에 두지 않으면 뒤에 나올 숫자가 전부 오해를 산다.
세기 시작하자마자 걸린 게 있다. 한국 메뉴판에는 9,900원의 그 9가 아예 없다.
미국 논문들이 다루는 가격은 $9.99다. 9가 붙는 자리는 센트, 우리로 치면 1원 단위다. 그런데 내가 센 2만 7,367개 가격 중에서 일원 자리가 0이 아닌 것은 딱 두 개였다. 나머지 2만 7,365개가 전부 0으로 끝났다. 십원 자리까지 봐도 99.9%가 0이다. 990원짜리는 3만 개 가까운 가격 중 하나 나왔다.
같은 '9로 끝나는 가격'이라고 불러왔지만 자리가 다르다. 우리에게 남은 자리는 백원 하나뿐이고, 실제로 백원 자리가 9인 가격 4,216개를 열어보니 99.9%가 정확히 900으로 끝났다. 950원이나 990원으로 끝나는 변형은 없다시피 했다. 한국 골목에서 고를 수 있는 '9'는 사실상 한 가지 모양이다.
우리가 고를 수 있는 끝자리는 셋뿐이다. 900이냐, 500이냐, 딱 떨어지느냐.
그렇다면 그 900이 골목을 지배하고 있을까. 메인 메뉴 2만 760개에서 가장 많이 나온 가격을 세어봤다.
1위는 4,500원이었다. 668번 나왔다. 2위가 5,500원(501번), 3위가 5,000원(495번). 4,900원은 279번으로 4,500원의 절반도 안 됐다. 같은 가격대에서 5가 9를 2.4배 차이로 이겼다.
구간을 넓혀도 그대로다. 1천원에서 5천원 사이 가격 중 500으로 끝나는 것이 27.3%인데 900으로 끝나는 것은 11.7%다. 5천원에서 1만원 사이도 24.4% 대 13.3%로 500이 앞선다.
분식집 김밥, 카페 아메리카노, 그 가격대에서 사장님들이 실제로 쓰는 끝자리는 9가 아니라 5였다. 통설이 가르쳐온 것과 반대다.
여기서 끝냈으면 절반만 본 것이다. 가격대를 올려가며 다시 셌더니 순위가 뒤집히는 지점이 있었다.
1만원을 넘는 순간이다. 1만~2만원 구간에서 900으로 끝나는 가격이 31.3%로 뛴다. 반대로 500은 15.2%로 반토막 난다. 이 구간의 최다 가격이 11,900원(310번)·12,900원(267번)·13,900원(259번)이다. 우리가 배달앱에서 눈에 익은 그 숫자들이 여기 몰려 있다.
그런데 더 올리면 또 바뀐다. 2만원을 넘어서면 딱 떨어지는 가격이 돌아온다. 2만~3만원대에서 천원 단위 라운드 가격이 51.3%, 3만~5만원대는 54.7%, 5만원이 넘으면 77.4%가 천원 단위로 딱 떨어졌다. 900은 이 구간에서 6.8%까지 주저앉는다.
정리하면 이렇다. 500 → 900 → 딱 떨어지는 가격 순서로 바통이 넘어간다. 9는 골목 전체를 지배하는 법칙이 아니라 만원대라는 좁은 구간의 관습이었다.
9는 만원대에서만 산다. 그 위로도 아래로도 다른 숫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내에 선행 연구가 하나 있다. 김가은·석관호 교수의 2021년 논문 「900원 혹은 990원? 우리나라 소비재 가격의 끝자리 연구」(마케팅연구 36권 2호)다. 국내 대형 유통업체에서 파는 소비재 가격을 모아 끝자리 관행을 정리한 연구다. 초록을 직접 확인했다.
이 논문은 백원 자리에서 9, 0, 5 순으로 많이 쓰인다고 보고했다. 내가 센 배달앱은 0, 5, 9 순이다. 순서가 다르다. 십원 자리에서도 논문은 0 다음으로 8이 많다고 했는데, 배달앱에는 8로 끝나는 가격이 사실상 없었다. 마트 진열대의 1,980원 같은 가격표가 메뉴판에는 안 온 셈이다.
다만 한 대목은 정확히 겹쳤다. 논문은 "가격 수준이 높을수록 라운드 가격이 많이 사용된다"고 했고, 내 데이터에서도 5만원 이상은 77.4%가 라운드였다. 값이 커지면 끝자리를 만지지 않는다는 건 마트에서도 골목에서도 같았다.
대신 내 데이터에는 논문이 말하지 않은 모양이 하나 더 있었다. 논문의 서술은 값이 오를수록 9가 줄어드는 내리막인데, 배달앱은 만원대에 봉우리가 하나 솟아 있다. 다루는 물건이 다르니(공산품과 음식) 곧바로 어느 쪽이 맞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메뉴판의 끝자리는 마트 매대의 끝자리와 같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오늘 제일 오래 들여다본 건 내가 EP.13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 편에서 나는 "9는 통하되 자릿수가 바뀌는 자리에서"라고 닫았다. 9,900원에서 10,000원으로 넘어갈 때처럼 맨 앞자리가 바뀌는 구간이 특별하다는 해외 이론을 따른 착지였다. 그게 맞다면 사장님들도 그 자리에 몰렸어야 한다.
세어봤다. 9,000원대에서 900으로 끝나는 비율은 21.2%였는데, 만 단위가 안 바뀌는 1만1천원대가 34.3%로 오히려 더 높았다. 1만9천원대는 40.7%, 2만9천원대는 29.8%로 들쭉날쭉했다. 자릿수를 넘기 직전 구간의 평균이 30.6%, 나머지 구간이 26.6%. 방향은 살짝 맞는데 구간별 편차가 그 차이보다 크다. 이 정도로는 확인됐다고 쓸 수 없다.
그러니 오늘의 결론은 이렇다. 내 지난 편의 착지를 국내 관행이 지지해주지 않았다. 뒤집혔다고까지는 못 한다 — 관행은 효과가 아니니까. 하지만 "국내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슬쩍 기대고 있었다면, 그 기댈 자리는 없었다.
한 가지 더. 360곳 중 264곳(73.3%)이 900으로 끝나는 가격을 하나 이상 쓰고 있었다. 9를 모르는 게 아니다. 알면서 어디에 쓸지를 고르고 있는 것이다. 4,500원짜리 김밥에는 안 붙이고 12,900원짜리 세트에는 붙인다. 나는 이게 유행을 따라간 결과라기보다, 오래 장사하면서 손에 익은 감각에 가깝다고 본다.
덧붙여, 프랜차이즈와 개인 가게가 갈린 지점도 500이었다. 500으로 끝나는 가격이 개인 가게는 24.8%, 프랜차이즈는 14.4%다. 500원은 골목의 말이다.
소상공인 · 마케터라면
- 내 메뉴가 5천원 아래라면, 이웃 가게들이 실제로 쓰는 끝자리는 9가 아니라 5입니다. 4,900원을 붙이기 전에 주변 메뉴판의 끝자리를 스무 개만 세어보십시오.
- 1만~2만원 구간은 900이 자리 잡은 유일한 구간입니다. 세트·2인분 메뉴를 이 가격대에 놓는다면 900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 2만원이 넘어가면 딱 떨어지는 가격이 다수입니다. 3만9,900원은 눈에 띄기보다 값을 깎아 보이려 애쓴 티가 날 수 있습니다.
- 일원·십원 자리는 건드리지 마십시오. 990원이나 1,980원은 마트의 문법이고, 메뉴판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숫자가 많이 쓰이는 가격일 뿐 잘 팔리는 가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끝자리를 바꾸실 거라면 한 메뉴만 한 달 바꿔보고 판매량을 직접 비교해 보십시오.
혹시 끝자리를 900에서 500으로, 또는 그 반대로 바꿔본 적 있으신가요? 바꾸고 나서 뭐가 달라졌는지 댓글로 들려주십시오. 저는 오늘 관행까지만 셌습니다. 실제로 팔린 이야기는 사장님들에게만 있습니다.
#가격전략#끝자리가격#배달앱#소상공인#메뉴판#가격심리#실측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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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잡이는 어디까지가 마케팅인가 — 조작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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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먼저 8,800원. 제 표본에 42개 있었습니다. 보신 게 맞습니다. 8,040원은 없었지만 십원 단위를 쓰는 가격이 27개 나왔고(2,950원·3,750원·1,850원 등) 대부분 강남과 부산의 카페·1인 메뉴였습니다. 2만 7천 개 중 27개니까 0.1%입니다. 드물지만 실재합니다.
"3만원보다 29,900원이 할인 느낌"은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장님들의 선택은 반대였습니다.
29,900원 39개 / 30,000원 71개
19,900원 79개 / 20,000원 130개
9,900원 235개 / 10,000원 322개
39,900원 31개 / 40,000원 44개
네 쌍 모두 라운드가 1.4~1.8배 많습니다. 다만 이건 "안 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센 건 사장님이 무엇을 붙였는가지 손님이 무엇에 반응했는가가 아니니까요. 느낌은 손님 쪽에 있고 제 숫자는 가게 쪽에 있습니다. 둘이 어긋난다는 게 오히려 볼 만한 대목입니다.
삼각김밥은 말씀대로였습니다. 1,500원 이하 메뉴에서 900원은 11개, 1,000원은 79개로 일곱 배 차이입니다. 그 가격대에서는 아무도 9를 쓰지 않습니다.
"9는 2~3만원대"도 맞았습니다. 2만~3만원 구간이 31.8%로 실제 최고점입니다. 다만 위쪽에 경계가 하나 더 있습니다. 3만원을 넘으면 20.6%, 5만원을 넘으면 6.8%로 떨어집니다. 9가 사는 구간은 1만원에서 3만원 사이고 그 위로는 다시 라운드입니다.
마지막 것은 제가 못 쟀습니다. 계산의 편리함이라는 설명은 제 데이터로 확인이 안 됩니다. 2로 나누든 3으로 나누든 500이나 900이나 라운드나 비율이 똑같이 나옵니다(3으로 나눠떨어지는 비율이 셋 다 33% 안팎). 나눗셈으로는 5의 우위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게 나눗셈이 아니라 암산 쪽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4,500원 세 개는 13,500원이고 4,900원 세 개는 14,700원입니다. 500은 두 개 모으면 자리가 올라가는데 900은 모을수록 지저분해집니다. 더치페이가 일상인 곳에서는 이게 실제 비용일 수 있습니다. 이건 가격표만 봐서는 안 나오고 계산하는 장면을 봐야 나옵니다.
다음 편 숙제로 가져가겠습니다. 제가 오늘 센 것은 "무엇을 붙였나"까지였고, 왜 하필 5인가는 아직 답이 없습니다.